본명
Ruth Elizabeth Davis
루스 일리저버스 데이비스
출생
1908년 4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우얼
미국의 배우.
고전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한 배우 중 한 명으로, 5년 연속(1939–43년)으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배우일 만큼[5]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2위에 선정되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에 등장한 점이 후대에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거침없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남성 위주였던 당시 할리우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캐서린 헵번과 함께 본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해 인권이 취약하던 시절 소수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다.[6] 1980년대에는 젊은 시절의 악역 이미지와 더불어 말년에 자주하던 과장된 연기와 TV 인터뷰에서의 디바 같은 태도가 일종의 밈이 되었는데, 이 덕분에 주디 갈런드와 함께 게이 아이콘으로도 유명했다.
경력 초기에는 "당시 여배우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얼굴 때문에 줄줄이 퇴짜를 받았다."[7] 영화 속 의상들 역시 데이비스의 몸매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 감추고 보정하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스타일 측면에서 남긴 게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두를 영화를 볼 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데이비스가 전부 연기력 하나만으로 감쪽같이 숨겼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배우의 시초다.[8]
큰 눈으로 유명한데 처음 배우가 된 후 첫 소속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즈에서 배역을 못맡아 거의 짤릴 뻔 했으나 촬영감독이 그 큰 눈이 카메라에 잘 받을거라며 한 영화에 추천했고 그 영화로 데뷔를 한 일화가 있다. 눈이 워낙 유명해져서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1981년도에 빌보드 핫 100 9주 1위와 빌보드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한 킴 칸스의 "Bette Davis Eyes"라는 노래도 있다.[9] 마돈나의 싱글인 "Vogue"의 가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1938년, <제저벨>
1938년 <제저벨>로 윌리엄 와일러와 처음 작업을 함께 하면서 와일러의 초기 페르소나로 활동하였다. 데이비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에서 탈락하고, 소속사인 워너 사에게서 일종의 보상으로 받은게 제저벨 역이다. 워너 브라더스가 영화 배급권을 자기들이 갖는 대신, 워너 사 소속인 데이비스, 에롤 플린,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역들로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셀즈닉은 스칼렛 오하라 역은 신인이거나 얼굴이 덜 알려진 배우이길 원해서 데이비스는 애초에 제외되었다.[11] 우여곡절 끝에 작업하게 된 <제저벨>을 기점으로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 연속으로 후보에 올라가는 등 연기력이 활짝 꽃 핀 시기다.
하지만 이와 함께 경력이 슬슬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우선 1941년 여성으로선 최초이자 최연소로 아카데미 협회의 의장직에 오르지만 협회와의 불화로 사퇴하게 된다. 1940년작 <편지>까지 함께 성공적으로 작업한 윌리엄 와일러와도 불화로 인해 1941년작 <작은 여우들>을 끝으로 같이 작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0여년간의 흥행 연타도 1946년작 <디셉션>의 실패로 끝이 났다. 거기에다가 출산까지 겪으며 활동이 정체되었다.
하지만 1950년작 <이브의 모든 것>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연기를 펼치며 화려하게 재기하는 데 성공한다.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유력시 되었으나,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를 연기한 앤 백스터와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이 함께 후보에 오르면서 삼파전이 펼쳐지면서 표가 갈려 제3의 주자였던 주디 할러데이가 <귀여운 빌리>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할러데이 역시 명연기를 했다. 경쟁자들이 워낙에 대단했을뿐.
이후 다시 침체기를 겪다가 평소 앙숙지간이었던 조운 크로퍼드의 제안으로 1962년작 <제인의 말로>에 출연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제인의 말로>에서 두 주연 배우의 사이가 매우 안 좋다는 점이 서로를 증오하는[12] 두 자매 연기와 영화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가 워낙 기대작이었고 제작 당시 둘 다 경력이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둘은 싸움을 자제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전설적인 일화들이 남았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데이비스는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확실시 되었으나 정작 수상자는 <기적은 사랑과 함께>에서 헬런 켈러를 가르치는 앤 설러번 선생 역을 맡았던 앤 밴크로프트였다. <제인의 말로>의 성공 때문에 1960년대엔 미친 노파 역으로 주로 활동했다.
1964년, <제인의 말로>의 성공을 재현하고 싶었던 워너 사는 심리스릴러 <허쉬 허쉬 스윗 샬롯>을 만들게 된다. 원작 소설가, 이야기 골자, 감독, 두 주역까지 전부 전작 그대로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와 크로퍼드의 사이는 워너 사의 생각보다 훨씬 안 좋았고 크로퍼드는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로 교체되었다.
데이비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1983년 유방절제술을 받았고 결국 1989년 암으로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100만 달러 가량의 유산을 남겼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