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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2 23:18

빙 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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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 크로스비의 캐주얼한 무대 매너와 감미롭고 여유로운 노래 스타일은 두 세대의 팝 가수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를 당대의 가장 성공적인 엔터테이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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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해리 릴리스 크로즈비 주니어
Harry Lillis Crosby Jr.
출생
1903년 5월 3일
미국 워싱턴주 타코마

1927년 <Whispering>으로 유명한 폴 와이트먼 악단에 입단했다. 당시 폴 와이트먼은 '재즈의 왕'이라 불리는 거물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그의 악단에는 빅스 바이더벡, 타미 돌시를 비롯한 뛰어난 연주자들이 많았다. 그런 인물들과의 공연은 경력을 막 시작한 빙 크로스비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처음에 크로스비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리듬 보이즈>라는 보컬 트리오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뛰어난 바리톤 목소리와 푸른색의 큰 눈을 가진 잘생긴 외모 덕분에 그는 트리오 중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31년, 리듬 보이즈는 폴 와이트먼 악단을 떠나 거스 아른하임 오케스트라에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솔로 음반들을 내기 시작했으며 많은 곡이 히트를 쳤다. 빙 크로즈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의 인기 가수였던 루디 밸리가 말년에 가진 인터뷰에서 빙 크로즈비의 <I Found A Million Dollar Baby>를 듣고나서 자신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출현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에 크로즈비는 대표적으로 <Stardust> , <The Day You Came Along>, <Thanks> 등의 노래를 녹음했으며 1940년대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인 <White Christmas>[3]가 가장 유명하다. 친동생인 밥 크로스비 역시 유명한 가수 겸 배우였다.[4]
 


최초의 멀티미디어 스타이며, 최초의 미국 국민 가수, 아니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던 가수였다. 그 당시 음반 차트를 보면 1930년대에는 그냥 빙 크로스비가 음반 시장을 독식했었다. SP 음반을 내기만 하면 1등 찍던 시절이고 프랭크 시나트라 이전에는 빙 크로스비가 있었다. 그러나 빙 크로스비 전엔 이러한 류의 가수나 엔터테이너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전부터 레코드를 내는 가수들은 존재했지만, 배우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면서 대중음악계에서 압도적 인기를 끌며 한 시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아가 그 이후 시대에서도 회자될 만한 가수는 빙 크로즈비가 최초였던 것이다.[5] 그래서 빙 크로스비를 최초의 멀티 엔터테이너, 현대적 셀러브리티의 원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밥 호프는 이보다 조금 늦게, 프랭크 시나트라는 10년 정도 뒤다.[6]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동시대 영국의 알 보울리나 조금 늦게 등장한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같은 가수들부터, 현재의 마이클 부블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크루닝(Crooning)이라고 부르며, 부드럽게 속삭이듯이 노래하는, 트레디셔널 팝의 주요 창법이며, 빙 크로스비가 개발함으로써 이전 세대의 빌 머리[7] 류의 오페라틱한 창법이 사장되었다. 이는 1950년대 초 테너 마리오 란자[8]의 미국 시장 대성공으로 다시 컴백하긴 하지만 마리오 란자는 빌 머리 류의 팝 오페라틱이 아닌 진짜 테너였기에 달랐다.

연기 실력도 뛰어나 배우로도 상당히 성공한 사람으로, 멀티미디어 스타라는 수식어답게 가수와 배우 겸업 스타라는 개념을 거의 최초로 선보인 사람이다. 명장 리오 맥캐리가 자주 기용하던 배우였는데, <나의 길을 가련다>(1944) 같은 경우 크로스비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음향이나 영상 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인데, 우선 크로즈비의 성공 자체가 마이크의 발명과 큰 관련이 있다. 크로스비의 창법인 크루닝은 목소리 톤을 중시하는 창법인데, 마이크의 등장은 발성에 신경쓰지 않고도 톤을 살리는 창법에 큰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이런 발전이 겹쳐 악단이 아닌 가수가 중심이 되는 음악 산업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빙 크로스비는 그런 변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남게 되었다. 여기다 미국 최초로 오픈릴 테이프를 이용한 라디오 방송 제작 체제를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후 라디오 방송을 하던 도중 기술자 존 T. 멀린과 함께 사비를 털어서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를 샀는데 혜안은 제대로 적중해, 오픈릴 테이프가 방송국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 멀린과 함께 텔레비전 생방송을 위한 비디오테이프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얼리 어댑터적인 면모가 강했던 인물.

1974년 1월에 진균증을 앓고 폐가 손상되어 잠정 은퇴했다. 1977년 3월 패서디나에서 열린 쇼를 녹화하며 복귀했으나, 도중에 악단석에서 떨어져 디스크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한 달간 입원하게 됐다. 그러나 데이비드 보위와 합작을 하고 라이브를 하는 등 본격적으로 복귀에 시동을 걸었으나, 그 해 10월 13일 마드리드에서 프로골퍼 마누엘 피녜로 등과 골프를 하고 클럽을 나오다가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망 전 마지막 유언은 "이봐. 정말 멋진 게임 아니었나?"라는 내용이었다고. 아내에 따르면 그는 평소에 좋아하던 운동인 골프를 하다가 숨졌으며, 행복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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