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901년 2월 1일
미국 오하이오주 카디즈
윌리엄 클라크 게이블(영어: William Clark Gable, 1901년 2월 1일 ~ 1960년 11월 16일)은 미국 배우이다. 전성기 때 "할리우드의 제왕"(The King of Hollywood)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1]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게이블을 "현시대의 가장 위대한 남성 스타"에서 7위로 선정하였다.[2] 1917년부터 종종 무성영화의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60년대, 그의 사후 대한민국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 남북전쟁의 동란기를 꿋꿋하게 버티는 강인한 사나이 역할로 인상을 남겼다.
무명 배우 시절
극단에서 만난 배우 프랜스 도플러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게이블이 오랫동안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실망하여 청혼을 거절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게이블은 여배우 겸 연출가 조서핀 딜런[9]에게 연기지도를 받다가 1924년 결혼한다. 그 후 1928년 브로드웨이 연극 머시널(Machinal)에 캐스팅되는 걸 시작으로 몇몇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치아 관리를 별로 하지 않던 그에게서는 갈수록 구취가 심해졌다. 딜런은 게이블을 영화배우로 만들기 위해 치과치료부터 받게 했지만 구취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인 1930년 할리우드로 돌아와 그의 팬이었던 17세 연상의 부유한 사교계의 여왕인 리어 랭험[10]의 도움과 인맥으로 여러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심지어 연극 더 라스트 마일에서는 스펜서 트레이시가 주연을 맡게 되어 있는 것을 랭험이 인맥을 이용해서 게이블로 교체시킬 정도였다. 게이블은 그런 랭험과 사랑에 빠져 딜런과 결혼한 지 6년만인 1930년에 이혼한다. 이 무렵 게이블은 벌어진 양쪽 윗 앞니를 교정, 의치로 이용했다. 그 후 1931년에 랭험과 재혼하였다. 1931년 <파이터 포인트(The Finger Points)>, 1931년 <야간근무 간호원"(Night Nurse)> 등에서 갱 역을 소화해냈는데 이때의 이미지가 인상깊게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자유의 혼>(1931)을 통해 조연급에서 주연급으로 올라섰고 1931년부터 1954년까지 MGM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점차 쾌활하고 모험을 즐기는 중년 남성 역을 주로 맡아 유명해졌다. 1930년대에 할리우드의 미남 배우이자 이상적인 미국 남성상으로까지 호평을 얻었다. 1932년 여배우 진 할로우와 함께 출연한 <붉은 먼지>의 흥행 이후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에 캐스팅되었는데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에서 셔츠 아래 언더셔츠를 입지 않은 게이블의 맨 가슴이 보이자 그해 언더셔츠 판매고가 절반으로 극감하며 이후 지속되어 최대 75퍼센트의 매출이 저하되면서 해당 산업을 파괴시켰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파자마를 유행시키고 당근을 먹는 모습에서 벅스버니 캐릭터가 착안되고, 도너츠 먹는 법을 여주인공에게 알려주면서 던킨(dunk in)이라고 한 것이 던킨도너츠의 유래가 되는 등 게이블은 이 영화에서 엄청난 스타 파워를 입증하며 할리우드의 제왕으로서 입지를 다져 나갔다.
이 영화는 최초의 스크루볼 코미디이자 최초로 오스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영화로도 유명한 데,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남우 주연상, 여우 주연상,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촬영 직전까지 수많은 배우들에게 퇴짜를 맞았고, 소규모 영화사였던 콜롬비아는 MGM과 워너 브라더스 소속이였던 게이블과 클로뎃 콜베어를 빌려와서 간신히 영화를 끝냈다. 이 영화의 대성공으로 순식간에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음하였으니 고생 끝에 낙이 온 격.
1934년 <남자의 세계>, 1935년 <바운티호의 반란>을 찍어 대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여성팬이 생겨났고, 게이블 주변에는 여성팬들이 몰려왔다. 또한 여러 여배우들도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치아를 교정한 후 말끔한 외모가 되었고, 185cm의 훤칠한 키와 친절함으로 인해. 여성팬은 물론이고 남성팬들에게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때 할리우드의 아름다운 일부 여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되었다.
게이블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갈구해서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만 베풀어도 금방 마음을 주고 청혼을 했다고 한다. 조운 크로퍼드[11], 로레타 영 등이 새 연인들로 추정되었다. 일부 여배우들과는 실제로 연인관계였다.
1937년에는 영화 <새러토가(Saratoga)>, 1938년 <테스트 파일럿> 등의 주연을 맡았다. 1937년 영화 <파넬>에서는 아일랜드인 정치가 역할을 맡았는데 크게 실패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 역으로 캐스팅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 중 치아 관리를 잘 하지 않아서 비비언 리가 키스신을 찍다가 입냄새 때문에 안 찍겠다고 거부했고, 결국 찍기는 찍었는데 하마터면 입냄새 때문에 기절할 뻔했다는 비화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으로 1935년에 <바운티호의 반란>과 함께 두 번이나 아카데미상 후보자에 올랐다. 젊어서 어렵고 가난한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인데도 예전에 자기와 같은 신세였거나 동료였던 흑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배우로 성공해서도 그들을 잊지않고 반갑게 맞이했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같이 출연한 흑인배우들을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시사회에 못 나오게 하는 것에 반대했다. 만일 그들을 참석하지 못 하게 하면 자기도 시상식이고 뭐고 보이콧하겠다고 강력하게 따져서 흑인 배우들이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나오게 했던 것도, 젊은 시절의 고생했던 경험과 흑인들과 거리낌없이 친하게 지낸 경험 때문이다.
한편 리아 랭험은 결혼 8년만인 1939년에 이혼한다. 촬영장에서 영화 파트너로 만나 많은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는데, 랭험은 곧 어린 남편 주위에 몰려드는 여성팬들과 여배우들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랭험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정을 지키려 애썼지만 인기 코메디 여배우 캐롤 롬바드와 불륜을 시작한 게이블은 랭험에게 이혼을 종용했고, 랭험은 결국 승복하고 말았다. 평생에 걸친 그의 여성편력에 대해서는, 갓난아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할 존재를 찾아 방황하는 것이라는 동정어린 시선과 함께, 영화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여자들을 이용했다는 비판 어린 시선도 쏟아졌다. 1939년 3월 아내로부터 이혼을 받아내자마자 같은 달에 캐롤 롬바드와 재혼했다.
세번째 부인 롬바드에겐 마라라는 애칭을 붙였다. 그리고 1940년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신흥도시(Boom Town)> 등은 흥행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3년만에 끝이난다. 게이블은 1942년 1월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둘만을 위한 파티를 준비했다. 멋진 저택에 손수 풍선을 불어 장식하고 그녀가 오면 놀라게 할 초 장식도 꾸며놓았다. 그러나 미리 켜놓은 양초가 타들어 가던 1월 16일 8시경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롬바드는 오지 않고 항공기 추락 소식을 접했다. 전쟁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던 롬바드가 그의 곁으로 오기 위해 탔던 비행기가 라스베이거스 교외의 야산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롬바드가 죽은 뒤, 비탄에 잠겨 있던 게이블은 제2차 세계 대전에 미 육군 항공대 장교로 입대하여 참전, 항공 훈장을 받고 소령까지 진급했다.
독일의 히틀러가 게이블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게이블의 참전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부상 없이 생포해오는 것에 상당한 상금을 내걸었으나 생포되는 일은 없었다. 최소 5번이상 공군 포격수로서 공습에 참여한 게이블은 독일군 공격을 받아 거의 피격될 뻔했으며 이 일을 알게된 MGM은 게이블을 미국으로 송환했다. 송환된 이후 계속 전선으로 나가겠다고 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공대 생활 중 비행기를 몰던 게이블은 롬바드의 흔적을 찾으려고 사고가 일어난 라스베가스 산을 다년간 수색한 끝에 롬바드의 추락 현장에서 비행기 잔해들 중에 롬바드가 착용하던 스카프 조각을 찾아냈다. 이 스카프 조각을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 아끼며 죽을 때 같이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부분은 2015년 7월 19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다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