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블란도

by 사하라 posted Jul 02,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는 표식(表式)이다. 영화 연기의 역사는 브란도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He is the marker. There’s ‘before Brando’ and ‘after Brando’.
― 마틴 스코세이지

What became of Marlon Brando's ecological wonderland on the sea? I visited to find out

본명 말론 브란도 주니어
Marlon Brando Jr.[2]
국적 미국 
출생 1924년 4월 3일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tumblr 8ebc16cc1...


1924년 4월 3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청소년기에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으며, 보다못한 아버지의 강권으로 사관학교인 샤턱-세인트 메리스에 입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뉴욕에 상경하여 뉴스쿨의 드라마 워크숍에 등록했다.

브란도는 거기서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 제조기이자 또한 그룹 시어터(Group Theatre) 멤버 중 메소드 연기를 창시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를 파리에서 직접 만나 함께 협업도 해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한 스텔라 애들러 여사에게서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 고안된 메소드 연기법을 강조했다.

한번은 애들러 여사가 수업 시간 중 제자들에게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닭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연기해 보라 했고, 다른 모든 학생들은 제각기 푸드덕거리는 온갖 난리 요란법석을 떨며 닭들을 연기하는데 반해 브란도 혼자만 조용히 웅크리며 알을 품는 닭을 연기했었다. 애들러 여사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만 인정하며 푸드덕거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바보 멍청이들아! 닭들이 전쟁 난 걸 어떻게 안단 말이야!"라고 호통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 브란도는 메소드 연기법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고, 이 연기론을 적극 수용했다. 이 당시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프레드릭 마치를 꼽았다.[8]

 

external/ia.medi...

지옥의 묵시록

 


1944년에 《엄마를 기억해》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하였다. 194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으면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무렵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자신의 대타 배우였던 잭 팰런스와 권투를 하다가 그만 코가 부러져 매부리코가 되는 사고를 겪고 말았다.

어쨌든 이로서 일약 브로드웨이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은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할리우드는 온갖 공을 들였지만, 말론은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맨》(1950)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불과 1년 후,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동명의 영화판(엘리아 카잔 감독)에서도 주연을 맡으면서 생애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장편 영화계에 데뷔한 지 1년밖에 안된 신인 영화배우가 후보에 오른 셈이다.

그다음에는 헬스 엔젤스 창단 계기가 된 홀리스터 폭동을 소재로 한 영화 〈위험한 질주〉(The Wild One, 1953)에서 폭주족 리더 '조니 스트라블러' 역으로, 1950년대 막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청년세대의 반항기를 표현함으로서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에서, 도시를 휘젓던 폭주족으로 출연한 브란도는 당시 반항적인 미국의 비트 세대에게 우상이나 다를 바 없었고, 그의 모터사이클과 가죽자켓, 청바지, 엔지니어 부츠는 반항적인 젊은이의 상징이 되었다

external/theredl...

조니 스트라블러, 《와일드 원》 (1953)

 

이 영화 속 말론 브란도의 패션은 매카시즘 시대의 청춘인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반항아 연기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제임스 딘도 원래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모방한 것이며, 그를 동경하며 여러 면에서 닮으려고 노력했다 한다.

1954년에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 프론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배우로 성장했다. 이후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아가씨와 건달들》(1955), 《젊은 사자들》(1958), 《바운티호의 반란》(1962) 등으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과시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다소 주춤하는 듯 했으나, 1970년대 들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명작 《대부》(1972),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3)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6년 뒤에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력을 보여줬으며, 《슈퍼맨》(1978)에도 슈퍼맨의 부친 조-엘 역으로 출연[10]하기도 했다.

브란도는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에 이른바 성격파 배우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성격파 배우들은 브란도에게 빚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브란도 이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언제나 정의로운 보안관이나 역사상 유명한 전쟁 영웅 아님 장애를 이겨낸 실존 인물 등등의 바른 생활 사나이들에게만 주어졌고 안 그러면 주연상 후보에도 못 오르는 게 당연시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톰 행크스 스타일의 배우들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라도 오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브란도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는 술먹고 도박하며 아내를 폭행하고 처제를 강간하는 쓰레기를, 《워터프론트》에서는 돈 받고 사람 패주는 해결사를, 《대부》에서는 깡패 두목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는 섹스 중독에 빠진 중년 변태남을,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전쟁의 광기에 미쳐버린 군인 등의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홀딱 깨는 비정상 캐릭터로도 얼마든지 스타가 될 수 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하였다

 

external/ia.medi...에밀리아노 사파타, 《혁명아 자파타》 (1952)